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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근원적 의미를 생각한다1

작성자 노원나눔의집 | 날짜 2018/06/22 | 첨부 -

평화의 근원적 의미를 생각한다

이반 일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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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Ivan Illich) 역사가, 문명비평가. 원래 가톨릭 교회의 사제였으나 중남미에서의 반체제적 활동으로 교회에서 추방당한 이후 '떠돌이' 학자, 현자로서 세계 여러 대학과 지역사회를 오가며 현대 산업기술사회 체제를 근원적으로 묻는 저술과 강연활동을 계속해왔다. 여기에 소개하는 글은 1980121일에 일본 평화연구학회의 초청으로 요코하마에서 행한 강연기록을 옮긴 것인데, 출전은 In the Mirror of the Past(1992)이다. 일리치에 관한 좀더 자세한 이야기는녹색평론37(199711-12)에 실린 글이반 일리치 상투성과 기계에 맞서는 현인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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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카츠 사카모토 교수님. 당신께서 나를아시아 평화연구 학회의 창립에 즈음하여 기조강연의 연사로 초청해주신 데 대해 나는 영예스럽게 생각하는 동시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한 신뢰를 보여주신 데 대해 감사드리면서, 또한 일본적인 것에 대한 나의 무지를 여러분들께서 참아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그 언어에 대하여 완전한 무지상태에 있는 나라에서 공적인 강연을 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내가 오늘 말하도록 초대받은 주제는 현대영어의 쓰임새로는 붙잡기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핵심적인 영어단어 속에는 폭력이 숨겨져 있습니다. F. 케네디는 빈곤에 대한 '전쟁'을 선포할 수 있었고, 지금 평화주의자들은 평화를 위한 '전략'(문자 그대로의 전쟁계획)을 짜고 있습니다. 이처럼 공격성으로 틀지워진 언어를 가지고 나는 여러분에게 평화의 진정한 의미의 회복에 관해 말씀드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면서 내가 여러분들의 토착어에 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계속 염두에 두면서 말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내가 말하는 모든 낱말 하나하나는 평화를 말로 드러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나 자신에게 상기시켜주게 될 것입니다. 내게는 한 인간사회가 누리는 평화는 그 사회구성원들이 향유하는 시()만큼 개성적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의미를 번역한다는 것은 시를 번역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인 것입니다.

평화는 각 시대와 각 문화영역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타케시 이시다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들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처럼, 각 문화영역 내에서도 평화는 중심부와 주변부에서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중심부에서는 "평화의 유지"가 강조되지만, 주변부의 사람들은 "평화로이 내버려두어져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30년간의 이른바 '개발의 시대' 동안에 후자의 의미, '민중의 평화'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이것이 나의 주된 논제입니다. '발전'이라는 외피 밑에서 세계 전역을 통하여 민중의 평화를 깨트리는 전쟁이 계속되어왔습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발전이 이룩된 지역에서는 민중의 평화는 사실상 사라져버렸습니다. 나는 경제발전에 대한 제약 풀뿌리에서 시작하는 이야말로 민중이 자기의 평화를 회복하는 데 필수 조건이라고 믿습니다.

 

 

평화의 다양한 의미

문화는 늘 평화에 의미를 부여해왔습니다. 각각의 '에스노스' 민중, 공동체, 문화 는 그 자신의 '에토스' 신화, 법률, 여신, 이상 에 의해 비쳐지고,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강화되어왔습니다. 평화는 말처럼 토착적인 것입니다. 이시다 교수가 선정한 예들 속에서 에스노스와 에토스 사이의 이러한 교응()관계는 극히 명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유태인의 경우를 보십시다. 유태인 가장(家長)이 팔을 들어 자신의 가족과 양떼들에 축복을 내리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평화로 번역합니다. 그는 '샬롬'"먼 조상 아론의 턱수염을 통해서 올리브 기름처럼 뚝뚝 떨어지면서" 하늘로부터 흘러오는 은총으로 여깁니다. 셈족의 아버지에게 평화는 유일하고 진정한 신이 최근에 정착한 양치기들로 된 열두 부족 위에 내려주는 정의의 축복인 것입니다.

유태인에게 천사는 '샬롬'이라고 말하지, '팍스'라는 로마어를 말하지 않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의 총독이 팔레스타인의 땅에서 보병군단의 군기를 치켜들 때, 그의 시선은 하늘로 향하지 않습니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를 봅니다. 그는 그 도시에 법과 질서를 부과합니다. '샬롬''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같은 장소, 같은 때에 존재하더라도 그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공통적인 것이 없습니다.

우리 시대에 그 둘은 이제 모두 퇴색해버렸습니다. '샬롬'은 사사화(私事化)된 종교영역으로 물러나버렸고, '팍스''평화'라는 말로 세계를 침략해왔습니다. 팍스는 2천년 동안 지배 엘리트들에 의해 사용되어왔고, 그 과정에서 온갖 잡동사니를 가리키는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용어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십자가를 이데올로기로 전환시키는 데 이용했습니다. 카알 대제는 이 용어를 삭손족의 대학살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했습니다. 이노센트 3세는 칼[]을 십자가에 종속시키는 데 '팍스'라는 용어를 동원했습니다. 현대에 와서 정치지도자들은 이 용어를 조작하여 정당으로 하여금 군대를 통제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클레망소가 다같이 사용했던 말인 '팍스'는 이제 그 의미의 경계를 잃어버렸습니다. 이 용어를 체제 쪽에서 사용하든 반체제 쪽에서 사용하든, 그 정통성을 동서 어느쪽이 주장하든, 그것은 종파적이고 선교적(宣敎的)인 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팍스'라는 개념에는 다채로운 역사가 포함되어 있지만, 거기에 대해 별로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역사가들은 전쟁과 그 기술에 관한 논저로 도서관의 서고를 채우는 데 열중해왔을 뿐입니다. 오늘날 중국어 '화평(和平)'과 힌두어 '샨티'는 과거의 것과 다르지 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 말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어서 서로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중국어 '화평'은 하늘(), 위계질서 속에서의 부드럽고 고요한 조화를 의미하는 것인 반면에 인도의 '샨티'는 친밀하고 개인적이고 우주적이며 비위계적인 깨달음을 가리킵니다. 이렇듯, 간단히 말해서, 평화에는 동일화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구체적인 의미에서 평화는 ''를 그에 대응하는 '우리들' 속에 자리잡게 합니다. 그러나 각 언어영역에 있어서 이 대응 내용은 각각 다릅니다. 평화는 제일인칭 복수의 의미를 고정시킵니다. '배타적인 우리들' 말레이어의 '카미' 의 형태를 규정함으로써 평화는 '포괄적인 우리들' 말레이어에서는 '키타' 이 대두될 수 있는 토대가 됩니다. 이 말레이어의 '카미''키타' 사이의 차이는 태평양권의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이것은 유럽에서는 전혀 낯선 문법적 구분이며, 서구적인 '팍스' 개념에는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습니다. 현대 유럽어의 미분화된 '우리들(we)'은 의미론적으로 공격적인 단어입니다. 따라서, 아시아의 연구자들은, '키타'에 대하여 아무런 존중심이 없는 '팍스'에 대하여 철저한 경계심을 품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여기 극동에서는 평화연구가 서구에서보다는 좀더 쉽게 다음과 같은 자명한 원리에 토대를 두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 전쟁은 문화의 차이를 없애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평화는 각 문화가 독자성을 가지고, 다른 문화와 비교될 수 없는 방식으로 꽃피는 조건이 된다는 기본원리 말입니다.

그러므로, 평화는 결코 수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평화는 옮겨가면 반드시 타락합니다. 평화의 이전(移轉)은 전쟁을 의미합니다. 평화연구가 이러한 자명한 인종학적 사실을 무시할 때, 그것은 평화유지를 위한 테크놀로지로 전환됩니다. , 어떤 종류의 도덕 재무장론으로 떨어지거나 아니면 고급장교와 그들의 컴퓨터 게임에 의한 네거티브한 전쟁과학으로 전락해버릴 것입니다.

평화는 인종학적, 인류학적 현실에 입각하지 않는 한, 비현실적인 단순한 하나의 추상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평화의 역사적 차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때도 역시 평화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극히 최근까지, 전쟁은 평화를 완전히 파괴할 수는 없었고, 또한 평화의 모든 수준에 침투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계속되려면 전쟁을 지탱해주는 풀뿌리 민중의 자급의 문화(subsistence culture)가 존속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전쟁은 민중의 평화의 지속에 의존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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